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11세 (문단 편집) === 행방불명 === [[파일:Theofilos_Palaiologos.jpg]] [[그리스]]의 민속화가 테오필로스 하찌미하일이 1932년에 묘사한 전투. [[백마]]를 탄 장수가 콘스탄티노스 11세. >''' "도시는 무너졌고 나는 아직 살아있구나!"'''(η πόλις αλίσκεται, και εγώ ζω έτι)[* The city is/has fallen and I am still alive!] >---- >미하일 크리토불루스^^(1410 ~ 1470)^^의 기록 >''' "내 머리를 받아줄 그리스도인은 없는 것이냐?" '''(Δεν υπάρχει κανένας χριστιανός να μου πάρει το κεφάλι)[* Is there no Christian to take my head?] >----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1401 ~ 1480)^^의 기록 일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자,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할 생각이 없었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위의 [[유언]]을 남기고 끝까지 자신을 따르던 근위대와 함께 무너지는 성벽을 수의 삼아 밀려오는 오스만군에 돌격했고,[* 전해지는 말로는 마지막으로 적군에게 돌격하면서 자신의 몸에 달고 있던 황제로서의 상징물을 죄다 떼어냈기 때문에, 황제의 시체를 찾을 때 표식으로 추정할 만한 물건이 부츠 뿐이었다고 한다.] 오스만군에 유린당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행방불명]]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이것이 2,206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로마]]의 멸망이었다.''' 그러나 대개 콘스탄티노스가 오스만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제국 측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를 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는 도중에 죽임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 이에 [[영국]]의 도널드 니콜(Donald Nicol)^^(1923 ~ 2003)^^은 대체 어느 것이 진상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었고,[* 오스만이 결국 콘스탄티노스의 시체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그냥 황제인줄 모르고 죽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런 최후에 대한 내용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오스만 군이 그가 황제임을 인식했다면, 그의 시체를 가져가 포상을 받으려 했을터이니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적다][* 그러나 수많은 [[조조|지휘관]]들이나 군주들이 도주할 때 당연히 자신의 장식을 전부 몸에서 떼어낸 상태로 도주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황제가 도주하는 장면까지는 확인했으나 그 이후에 도주하는 병력을 전부 사로잡아 죽였을 때에는 더 이상 장식이 없어 구분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다만 동로마 역사가들은 그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그러나 이런 주장 또한 문제가 따르는데, 저 두 명은 직접 저 상황을 보고 기록을 한 것이 아니며, 황제와 함께 돌격했던 병사들도 죽거나 최소한 기록에서 증언을 해 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과연 도대체 어떻게 저 이야기를 알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오스만 군 측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이 황제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오스만 측과 유럽 국가들의 사료에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는 종교 문제와 문화권 차이, 질투심과 신성 로마 제국의 정통성 같은 복합적인 이유들, 그리고 팔레올로고스 황가의 온갖 패악질 등으로 로마 제국과 유럽 국가들의 관계가 오랫동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것만 확인했다고 한다. 다만 행적이 묘연한 것은 함락 뒤부터인데 터키어 위키백과에서까지 항복보다 저항을 택했다고 서술한 만큼 그 직전까지 가망이 없음을 알고도 결사적인 태도로 일관한 그가 자살은 몰라도 함락되고서야 도망을 쳤다는 것은 맥락이 맞지 않아 보인다. 영어, 그리스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도시를 탈출했다는 사료는 세 개뿐이며 당일에 사망했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편이라고 한다. 당시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창건자]][* [[기독교]] [[밀라노 칙령|공인]]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기준.]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동로마 제국|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이 소문은 들어맞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도 [[로마 왕국|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와 첫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툴루스는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이다. 또 콘스탄티노폴리스을 함락하고 새 수도로 삼은 오스만 술탄은 메흐메트 2세인데, 오스만의 마지막 황제는 메흐메트 6세이다.] 그리고 콘스탄티노스의 동생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 팔레올로고스|토마스]]가 통치하던 [[모레아 전제군주국]] 역시 형제 간의 내분으로 내전을 거듭하다 [[1460년]]에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으며, 또 다른 동로마계 국가인 [[아나톨리아]] 북부 폰토스의 [[트라페준타 제국]][* 팔레올로고스 가문보다 앞서 동로마 제국을 다스렸던 [[콤니노스 왕조]]가 황가였다.]도 이듬해인 1461년에 멸망 당했다. 이후 1475년에 테오도로 공국이, 1479년에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멸망하며 로마 제국의 마지막 잔재들은 완벽히 사라지게 된다.[* 작위 자체로 보면 로마 황제 칭호는 토마스를 거쳐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까지 이어지다가 안드레아스가 생활고로 인해 프랑스와 에스파냐에 작위를 팔았다. 이후에 두 국가는 딱히 그 칭호를 쓰려하지 않아 안드레아스가 사망하고 나선 사실상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 이피로스 데스포티스 칭호는 군주국이 망하고 나서도 토코 가문이 지속적으로 사용하다 1642년에 아카이아 공작위가 신설되며 사라지게 된다.] 이후 팔레올로고스 가문은 몬페라토 변경백 가문으로나마 이어지다 1533년 남계 혈통이 단절되며 이후 굴리엘모 9세의 딸이 곤차가 가문과 이어지는데 이 곤차가 가문의 후예가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이며 이로 인해 오늘날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에는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혈통이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